M-Review 현기증 2014 2014/11/25 06:00 by 수도원

치매환자를 둔 집안에서 벌어질 수도 있는 에피소드.
인상적인 전개에 비해 구체적 메시지의 제시는 없으며
치매환자에 대해 어찌어찌하자는 계몽적 박애적 구호 따윈 보이지 않는다. 
박애-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은 슬슬 정신적 욕구를 탐하기 시작한다.
자유, 예술, 명예 등이 그렇고 박애가 특히 그렇다. 굶어죽을 판국이라면 그런 류가 눈에 뜨일 리 없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으로 일찌감치 먹고 살만해진 프랑스에서 가장 격하게 태동한 박애는
서구사회의 번영과 발맞춰 오랫동안 그들의 정신세계에 맹목에 가깝게 각인되어
서구인을 특징짓는 한 필수요소가 되었다.
묵자의 겸애도 철기농경이 보급되기 시작한 춘추전국시대의 격동적 번영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도 로마제국의 번영이 있었기에 힘을 얻는다.
즉, 물질적 번영이란, 잉여생산물 소유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각축은, 각박하고 비정한 심사를 낳고
그 반성적 반작용으로 박애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헌데 현대인의 박애는 허울뿐인 득과 실제적 실로 변질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등 따시고 배 부르니 그렇지 못한 이웃을 돌아보는 것까진 좋은데
박애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닌, 박애하고 있단 자신으로부터 쾌감과 허영 농후한 자족을 구하는 듯 보인다.
짐승은 여러 새끼 가운데 제대로 키울 수 없는 녀석은 도태시키고 만다.
'반편이' 새끼에게 연민을 두었다간 나머지 새끼마저 위험에 빠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러나 사회적 시스템의 발동과 연민에 호소하여 도태되어야 할 개체를 부양하자고 주장한다. 
십시일반 돕자며 통장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전화 한통으로 나는 남을 돕는 경제적, 혹은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인간이라는 훈훈한 자긍과 만족감을 얻는다.   
흔히 나눔, 또는 배려라는 어휘로 포장되는 그러한 '부양', 공존의 도는 일면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이는 인간이 짐승과 구분되는 위대한 정신작용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십시일반 한 술씩 덜어 만든 한 그릇 온전한 밥을 반편이 1인에게 먹이고
10인은 아홉 술짜리 모자란 밥을 먹는다는 건 어쩐지 부당하다.
밥이 아니라 산소통이라고 가정해보자. 10분 버틸 산소통에서 10인이 1분씩 덜어
온전한 10분짜리 산소통을 반편이에게 주었다고 치자.
우연찮게 그 반편이만 최후 10분째에 온전한 산소탱크 덕분에 구조되고
10명은 1분 모자란 탓에 모조리 절명했다면?
과격하고 극단적인 비유라 여기겠지만 영화는 바로 그러한 기막힌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기막히지만 어불성설도, 있을 수 없는 가정도 아니며 그럴 법하다못해 공감을 자아내는 가능성이다. 
사실상 치매환자 1인의 어처구니없는 망녕된 행동으로 일가족이 몰살되다시피한 현실-
어줍잖은 박애와 설마 내가 사건사고의 제물이 될 리 없단 무사안일, 엄마에 대한 연민과 윤리적 부담은
되려 큰딸 내외를 사지로 내몰았고 가족의 공멸로 이어진다.
복잡하게 이렇게 죽고 저렇고 죽고 할 필요도 없이 오밤중에 일가족이 자는 집에 불을 싸질러 원샷으로
황천길로 보낼 수도 있다.
치매든 무슨 이유로든 인격과 존엄을 상실했다면 곧 짐승과 다름없으며,
회복 불능이라면 가혹하지만 죽는 게 낫다.
적잖은 사회적 비용과 불특정 다수의 희생을 업고 치매환자 혼자 살아남은들 희생을 기리고
삶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길 수 없는 주제라면 죽는 게 낫다.
내가 좀비로 변하면 가차없이 머리를 쏴라.. 흔한 좀비영화의 비장한 대사처럼
나 또한 존엄하게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부탁이다-
누구든 내 머리를 쏴달라.